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 14세 요한 (문단 편집) === 나폴레옹과의 불화의 시작 === 그 때문에, 1807년 아우어슈테트 전투, 예나 전투에서 아무런 활약도 못하여[* 원래 아우어슈테르전투에 참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예나 방면으로 가는 바람에 다부의 부대 혼자서 두 배에 달하는 프로이센군을 막아 악전고투 끝에 승리했다. 그런데다가 예나 전투는 나폴레옹의 압승으로 빨리 끝나버리는 바람에 베르나도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만 이때 고려해야 될 것은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주력군이 예나에 있다고 착각하고 그를 예나로 불렀기 때문에 만약 다부를 지원하러 갔다가 별 것 아니면 오히려 더 안 좋을 수도 있었다. 특히 이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기병대도 거의 없는 군단을 이끌고 패잔병 추격을 잘 못했다고 혼이 난 그로서는 어떻게든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다만 결과가 나빴을 뿐이다. 그러나 앞의 서술은 조금 잘못이 있는 것이 애초에 나폴레옹은 다부의 군단과 합류해서 움직이라는 명령을 분명히 베르나도트에게 전했다! 그냥 베르나도트가 개인적인 앙숙이며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다부를 도울 생각이 없었고 이에 독자적인 판단을 했다가 프랑스군에 파국을 맞을 뻔 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부의 전갈을 받은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가 또 말썽이다 라고 까지 말했을 정도] 프랑스군 원수 직위와 퐁트 코르보 대공의 지위를 잃게 될 위기에 빠지나, 그의 아내이자 나폴레옹의 전여친(...)이었던 데지레 클라리의 '''베갯머리 송사''' 덕분에 지위유지에 성공하고, 프로이센의 명장 [[블뤼허]] 원수를 격퇴하고,[* 이때 그는 꽤나 활약을 하여 장기전이 될거라 예상하고 도시 여관에 있던 블뤼허가 성문이 뚫렸다는 소식을 듣고 의복도 제대로 못 갖추고 허겁지겁 도망가야 했다. 그러나 도망칠 곳도 없어 결국 자원이 떨어져 그렇다며 항복한다.] 바그람 전투에서 활약하는 등 나폴레옹의 마음을 돌려, 나폴레옹이 그의 아들의 [[대부]]가 되어주는 등 '''일단은''' 나폴레옹과 화해하는 듯 했다. 사실 베르나도트는 [[바그람 전투]] 당시에도 삽질을 반복했다. 작센인 군단을 이끌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누구라도 관심만 보여준다면 그의 '결정적인 기동' 한 번으로 오스트리아군 진영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큰소리를 땅땅 쳐댔는데, 7월 6일의 전투에서 아더클라 시가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작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집중포격에 신나게 두들겨맞고 '''나폴레옹이 있는 곳까지''' 쫓겨오는 추태를 보였다. 나폴레옹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베르나도트에게 '''"자네가 말하던 결정적인 기동이란 건 이런 거였나?"'''라고 한 마디 던졌는데, 베르나도트에게는 뭐라 변명할 정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가까스로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 후 베르나도트는 '''황제만이 읽을 수 있는''' 승전 기념사를 자기가, 그것도 작센군의 전공이 제일이라는 내용으로 바꿔 읽는 핵폭탄급 불경죄를 터뜨린다!!! 베르나도트는 그 직후 보직해임을 당했지만, 무적의 데지레 쉴드(...)와 그 후 네덜란드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세운 전공 덕분에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베르나도트에 대한 악평에 불과하고,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일단 상술한 "결정적 기동" 이야기는 일설에 불과하며, 나폴레옹의 부당한 지휘에 분개한 베르나도트가 '''먼저 사표를 던졌다'''는 말도 있다. 애초에 베르나도트의 군 편제 문제를 살펴보면, 베르나도트의 9군단은 작센인으로 편성된 2진급 군단이었고 게다가 가장 낫다고 할 수 있는 뒤푸이 사단은 나폴레옹이 멋대로 외젠군에 배속시켜 9천여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군의 배치는 중앙이 툭 튀어나와 있었는데, 당연히 그 중앙에 공격이 집중될게 뻔한데도 가장 약한 사단을 배치한 것이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해당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포격 사거리 안이었다.] 게다가 베르나도트는 전날 나폴레옹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루어진 야습에 실패하여 자신의 군단을 정비하느라 전체 군단장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여 마세나가 도와주러 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패잔병을 다시 소집하려면 남하하는 것이 나았으므로 무조건 질책할 수 만은 없다. 또한 사실 전체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믿지 않고 약한 군단을 보낸 나폴레옹의 의도가 베르나도트가 오스트리아군의 대포를 맞고 죽어버리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도 있다. 게다가 그는 원정 준비에서 나폴레옹의 핵심측근인 베르티에가 자신의 원정 준비를 방해하는 것을 느끼고 사임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승전 기념사를 쓴 것이나 나폴레옹에게 후퇴를 알리지도 않은 것은 확실히 베르나도트의 잘못이었다. 이 잘못은 그만큼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사이가 박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베르나도트는 [[덴마크]] 4차 대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의 패잔병 소탕 도중 우연히 끼어들게 된 [[스웨덴군]] 포로들을 잘 대해줘 스웨덴인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작은 사실이 엄청난 일로 번지게 되었으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